마음

파드마남걀 아지타 교무 (PADMA NAMGYAL AJITA KYOMUNIM) | 법명 원현장, 원불교 교무

인도 라다크 출신인 원불교 교무이신 아지타님은 수년전 뉴저지 하늘뜻교회에서 하늘뜻펴기를 한 인연으로 이 글을 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원고를 한글로 작성해 주신 노력과 진심에 감사드린다.  

photo from Pexels

며칠 후에 제목을 받아보니 참으로 묘했다. 주어진 제목은 ‘마음’이었다.

2015년에 미국 동서문화센터에서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공부를 마친 후 뉴욕을 방문할 때 하늘뜻교회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인연으로 오늘 이 글까지 게재하게 되었다. 한재경 목사님으로부터 원고 부탁을 받았을 때 제목은 몰랐지만 주저하지 않고 흔쾌히 응했다. 며칠 후에 제목을 받아보니 참으로 묘했다. 주어진 제목은 ‘마음’이었다.

마음이라고 하면 늘 떠오르는 성가가 하나 있다. 원불교의 「입정의 노래」다.

예쁘고 밉고 참마음 아닙니다

좋고 나쁘고 참마음 아닙니다

허공처럼 텅 빈 마음 그것이 참마음

이 마음속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마음 없습니다

안에서 나가는 마음 없습니다.

없다는 한마음 그 맘도 없습니다.

없고 없고 없는 마음 그대로 그대로[1]

마음이 무엇이냐? 어떻게 생겼냐? 마음은 어디 있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인도 히말라야 설산에서 티벳불교를 신앙하는 가정에 태어난 나는 아침마다 1~2시간 동안 진행되는 아버지의 불경독경 소리에 잠을 깼다. 티벳에서 불교를 배우고 온 아버지는 불경 공부만큼은 엄격하지 않았고,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불경을 배웠지만 어린 나이에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 내용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좀 더 커서 남인도 뱅갈로르에 유학을 가 불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소승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황금의 기회를 얻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마음 외에는 없다. 팔만사천경의 핵심도 원래 청청한 마음을 발견하여 닦아 지혜의 등불을 켜라는 것이다.

좀 더 성숙한 청년이 되었을 즈음에 남인도 뱅갈로르를 방문한 한국의 박청수 교무님을 만나 원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공부를 해보니 원불교 가르침의 핵심도 오직 마음 뿐이었다. 26세에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에서 스스로 진리를 깨친 젊은 소태산 대종사(1891~1943)는 “원만구족[2]하고 지공무사[3]한 각자의 마음을 알고,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양성하고,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사용하자”[4]고 했는데, 이것을 보아도 원불교 가르침도 마음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공부를 해보니 원불교 가르침의 핵심도 오직 마음 뿐이었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이고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생겼을까?

마음은 ‘이것이다’라고 딱 보여줄 수는 없다. 마음은 무형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면, 어떤 사람은 가슴에 손을 얹고, 어떤 사람은 이마를 가리키며, 어떤 사람은 머리를 가리킨다. 각자가 성장한 환경에 따라 생각하는 마음의 위치는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인간은 마음이 없으면 존재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소태산 대종사는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미묘하여 잡으면 있어지고 놓으면 없어진다[5]”라고 하였다. 무형의 마음은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다는 것을 증명하신 것이다.

photo from Pexels

그럼 그 존재하는 마음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형상이 있고 색깔이 있고 냄새가 있으면 마음 의 생김새를 쉽게 말할 수 있지만, 형상도 없고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는 그 마음은 참으로 묘한 것이다. 무형한 마음의 이치와 그 작용을 알아내느라 인도의 부처님께서는 36년을 고행하셨고 소태산 대종사는 어린 7세에 시작하여 19년의 구도과정을 거쳤다. “형상을 가진 이 육신도 무형한 마음이 들어서 지배[6]한다고 하셨듯이, 무형으로 존재하는 마음은 유형의 육신을 지배하고 있다.

그럼 왜 인도의 부처님과 한국의 소태산 대종사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에 모든 일생을 보내셨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마음은 모든 죄와 복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불교에서는 마음을 ‘심전(心田)’, 즉 ‘마음 밭’이라고 한다.

“본래에 분별과 주착이 없는 우리의 성품(性稟)에서 선악 간 마음 발하는 것이 마치 저 밭에서 여러 가지 농작물과 잡초가 나오는 것 같다 하여 우리의 마음 바탕을 ‘심전(心田)’이라 하고 묵은 밭을 잘 개척하여 좋은 밭을 만들 듯이 우리의 마음 바탕을 잘 단련하여 혜복(惠福)을 갖추어 얻자는 뜻에서 ‘심전 계발(心田啓發)’이라는 말이 있게 되었나니라.

그러므로 심전을 잘 계발하는 사람은 저 농사 잘 짓는 사람이 밭에 잡초가 나면 매고 또 매어 잡초는 없애고 농작물만 골라 가꾸어 가을에 많은 수확을 얻는 것 같다. 선악 간에 마음이 발하는 것을 잘 조사하고 또 조사하여 악심이 나면 제거하고 또 제거해서 악심은 없애고 양심만 양성하므로 혜복이 항상 넉넉할 것이다.

반대로 심전 계발을 잘못하는 사람은 농사를  잘 못짓는 사람이 밭에 잡초가 나도 내버려 두고 농작물이 나도 그대로 두어서 밭을 다 묵혀서 가을에 수확할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악한 마음이 나도 그대로 행하고 선한 마음이 나도 그대로 행하여 자행자지하는지라. 당하는 것이 고뿐이요, 혜복의 길은 더욱 멀어지나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천만 죄복이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이 심전 계발을 잘하고 못하는 데에 있나니, 이 일을 어찌 등한히 하리요.”[7]

마음은 하나의 밭과 같아서, 각자가 그 밭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죄(罪)나 복(福)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마음은 하나의 밭과 같아서, 각자가 그 밭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죄(罪)나 복(福)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꽃씨를 심으면 꽃이 나고 가시를 심으면 가시가 나온다. 꽃이냐 가시냐의 선택은 오로지 나에게 달려 있다. 부모, 스승님, 소태산 또는 부처님도 그것을 바꿀 수 없고 대신해서 책임질 수도 없다.

그래서 원불교에서는 선악을 잘 밝히는 마음의 힘을 기르고 마음의 면역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좌선과 염불을 한다. 일을 할 때에는 이 함축된 내면의 힘을 가지고 닥치는 상황에 쉽게 끌리지 않고, 선악 간 마음이 일어나는 곳에 농사를 잘 짓는다. 이렇게 밭을 잘 가꾸게 되면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예쁘고 추함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양분되지 않은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마음이야말로 허공처럼 텅 빈 참마음이다.

우리는 지역, 국가, 피부색, 생김새, 종교는 각각 다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마음이다. 부처님과 소태산 대종사 그리고 많은 성자가 밝혀주신 이 마음을 우리도 발견하여 잘 가꾸고 잘 사용하여 각자가 처한 곳에서 늘 혜복이 가득하길 빈다.


[1] 원불교 성가 182장 <입정의 노래>

[2] 원만구족(圓滿具足) – 부족함도 없고 결함도 없이 모든 것을 완전히 갖춤.

[3] 지공무사(至公無私) – 지극히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없음.

[4] 『정전』 제2 「교의편」 제1장 일원상 제3절 일원상의 수행

[5] 『대종경』 「수행편」 1장

[6] 『정산종사법어』 「원리편」 19장

[7] 『대종경』 「수행편」 5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