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사람 한 명만 있어도 그곳은 네가 있을 곳이 될 거야.” 옳다. 한 사람이 중요하다.
이동환목사 | 수원영광제일교회
아니 가야만 했다. 그렇게 그들의 곁에 서는 것이 조금이나마 내가 속한 집단이 저지른 일에 대한 속죄가 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자기야, 인천 퀴어문화축제 축복식에 한 사람이 급하게 필요하다는데 할 수 있어?” 아내가 물었다. 잠깐의 고민 끝에 “응, 그래” 대답했다. 다름 아닌 인천이었기에. 이 재판의 시작은 이러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터라 인천과는 별 인연이 없었다. 월미도에 ‘공포의 바이킹’을 타러 간 정도랄까. 교우 한 분이 커밍아웃을 한 이후 서울 퀴어문화축제에는 꼬박 참여했지만, 인천에서 열린 첫 축제에 굳이 참여할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도 그런 심리적 거리감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 거리감은 곧 죄책감으로 변했다. 그날을 기록한 영상에서 악에 받친 혐오의 욕설, 경멸과 분노로 가득 찬 핏발 서린 눈을 보았다. 주도적으로 행사를 방해한 사람들은 인천지역 감리교회 청년들이었고, 심지어 난동을 부리다 체포되어 수갑을 차고 연행된 이도 감리교회 목사였다.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차마 영상을 끝까지 볼 수 없었다. 온몸으로 그 난리를 겪어낸 축제의 주최자들과 참가자들이 염려되었다. 이미 기독교인들의 혐오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들을 몇 보아온 터라 더욱 그랬다. 그러던 차에 들어온 섭외였고,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니 가야만 했다. 그렇게 그들의 곁에 서는 것이 조금이나마 내가 속한 집단이 저지른 일에 대한 속죄가 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축복식 당일 아침, 축제 장소로 이동하는 중에 아내가 심각한 얼굴로 친구에게서 온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축복식을 하는 감리교 목사가 누군지 색출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전날 홍보한 웹포스터가 화근이었다. 잠시 후 나에게도 전화가 걸려 오기 시작했다. 일단 받지 않았다. 별일이야 있겠나 싶었다. 웬걸 장소에 도착해 성의를 입으니 다짜고짜 당신이 이동환 목사냐 물어보기도 하고, 몰래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때서야 상황의 심각성이 느껴졌다. 아, 일이 났구나. 잔뜩 위축된 채로 축복식 무대에 올랐고 표정도 목소리도 딱딱하게 굳은 게 느껴졌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예식문을 읽고 무대에서 내려가 참가자들 사이로 다니며 꽃을 뿌리다 어떤 이의 표정을 봤다. 꽃비를 맞은 그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였더라, 어디였더라. 잠시 생각하다 이내 깨달았다. 교회에서 소위 ‘은혜’받고 환하게 빛나는 얼굴, 바로 그 표정이었다. 이렇게 빛나게 웃을 줄 아는 이들인데, 교회가 이들의 웃음을 앗아갔었구나 싶어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조금 울었고 많이 웃었다. 그 시간만큼은 행사장 밖에서 비웃고 조롱하는 이들의 외침도, 아침부터 나를 괴롭히던 위협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빛나게 웃을 줄 아는 이들인데, 교회가 이들의 웃음을 앗아갔었구나 싶어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조금 울었고 많이 웃었다
며칠 후 교단에 고발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마약법 위반, 도박 및 동성애를 찬성하거나 동조하는 행위’라는 범과를 저지른 것이라 했다. 법 자체도 이상하지만 축복기도가 죄가 된다는 건 듣도보도 못한 일이었다. 그렇게 심사에 부쳐졌다. 심사위원들은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몰아붙였고, 감리회의 망신이라고 했다. 심문을 받으며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소신을 지켜야 하는지 아니면 마음에도 없는 용서를 구해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렇게 첫 심사를 받고 나오니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고립감이 온 마음을 잠식했다. 모임에 가면 모두 내 이야기를 수군거리는 양 느껴졌다.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절실했다. 동병상련이라 했던가. 그제야 당사자들이 느낄 고립감이 무엇일지, 어떤 억압 속에서 무엇을 감내하며 살아가는지 아주 조금 알 것 같았다.
노하라 쿠로의 만화 「너의 뒤에서」에서 게이인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이 없어 외로움을 호소하는 타케루에게 친구 코우타로가 내가 그대의 벗이 되겠노라며 이런 말을 해준다. “소중한 사람 한 명만 있어도 그곳은 네가 있을 곳이 될 거야.” 옳다. 한 사람이 중요하다. 나 역시 곁을 지켜준 벗들의 도움으로 지독한 고립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들이 기꺼이 함께 비바람을 맞아주마 나서 주었다. 누군가의 고통을 감각하고, 그로부터 시작된 사랑은 고통의 자리로 발걸음을 옮기게 한다. 사랑을 좇아 이 사안을 자신의 문제로 여기는 이들이 하나 둘 생겨나며 ‘나’의 일은 점점 ‘우리’의 일이 되었다.
“소중한 사람 한 명만 있어도 그곳은 네가 있을 곳이 될 거야.” 옳다. 한 사람이 중요하다. 나 역시 곁을 지켜준 벗들의 도움으로 지독한 고립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심사를 받고 재판에 회부되기까지, ‘동성애를 죄라고만 하면’ 없는 일로 해주겠다는 회유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때론 아껴주는 마음에 소나기가 내릴 때는 피하는 거라며 한 번 숙이고 넘어가라 권유해주는 분들도 있었다. 지금 분위기에서는 면직, 출교도 각오해야 한다고 했다. 목사 신분은 부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마음속 수많은 번민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그래도, 우리 교우를 교단 내 범과자로 만드는 이런 법에 동조할 수 없었다. 내 곁에 서 주었던 이들이 있었듯 나도 ‘한 사람’이 되리라 다짐했다. 남들과는 다른 정체성으로 혼란스러워 하는 이들이, 자신의 성적 지향에 죄책감이 느껴져 신 앞에 울며불며 고쳐 달라고 기도하는 이들이 혼자라고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고립감에 홀로 죽어가지 않도록 곁이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현재 한국교회의 여러 교단들은 ‘동성애 처벌법’을 제정하여 성소수자와 엘라이(성소수자들의 지지자, 편집자주)를 향한 장벽을 세우고 있다. 혐오로 쌓아 올린 그 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교회에서 불법적인 존재로 낙인 찍어버리고 사랑을 단절시켜 버린다. 다시 축복(祝福)을 생각한다. 말 그대로 복을 빌어주는 행위. 복은 신으로부터 인간에게로 내려온다. 그렇게 신과 연결된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더불어 서로의 다양한 고유함을 환대하며 복된 존재로서 살아가게 된다는 기독교 신앙의 고백이 이 단어 안에 있다.
이천 년 전에도 그 막힌 담 앞에 서서 자신의 육신으로 벽을 허물고, 삶으로 사랑을 확장해 나간 ‘한 사람’ 예수는 늘 억압받고 비통했던 이들의 편에 서 있었다. 그렇게 벽을 허물고 이웃의 고통에 공명하는 것. 그렇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은 우리가 ‘한 편’이 되어 불의한 세상에 맞서는 것. 이것이 연대이고 이런 상호작용 속에서 인간의 존엄은 또렷해 진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육신을 입는 것이리라.
‘신이 그러하신 것처럼 나 역시 그대들의 존재가 자랑스러워요’라는 속삭임이 그들의 귓가에 가닿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