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에 대한 성찰

나는 고통 가운데 있는 누군가를 이웃화 시키며 들썩이는 추수감사절이 불편하다.

윤영석 | 성공회신부, NewYork-Presbyterian Hospital 원목

photo from pixabay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가 아니라 “나는 고통 받는 이의 이웃입니까?”가 옳은 질문이다.

SNS로 지역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에 이웃은 무엇일까 생각한다. 이웃은 그리스도인에게 익숙한 주제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자신만의 이웃을 정하고 그 기준에 들어가지 않는 이들을 타인화시켰던 율법교사처럼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는다.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화를 들려준다. 나는 이 예화의 요점이 내가 내 이웃을 정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나를 이웃으로 여기는 것의 여부에 있다고 본다. 강도 당한 자를 이웃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강도 당한 자가 나를 이웃으로 생각하느냐에 있다는 말이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가 아니라 “나는 고통 받는 이의 이웃입니까?”가 옳은 질문이다.

강도 당한 자 혹은 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이에게 나는 이웃일까? 아니면 그저 선한 얼굴을 하고 가끔 몇푼 쥐어주고 자신의 선행에 만족해 하는 방관자일까? 더 나은 상황에 있는 내가 누가 이웃인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서 잊혀진 이에게 선택권을 줘야 한다는 게 예수의 가르침 아닐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보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이웃화’ 시켰을까? 좀 더 나은 상황에 있는 우리 자신이 사회적 약자에 의해 ‘이웃화’ 되어지는, 즉 연약한 이들이 우리를 받아들이는 게 ‘강도 당한 이’의 예화가 주는 교훈이다. 사마리아인은 그의 선행으로 강도 당한 이의 이웃이 된다. 그가 선한 이유는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이 아니라 강도 당한 이가 그를 이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당한 이를 이웃으로 선택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 주위에 강도 당한 이를 이웃으로 봐야 한다는 식의 이해는 자못 위험하다. 어찌보면 사회적 불균형을 지속화시키는 용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강도 당한 이의 고통이 나의 이웃이 되기 위한 자격 요건이 되어 버리듯. 그래서 나는 불행에 빠진, 고통 가운데 있는 누군가를 이웃화 시키는 모양새로 들썩이는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이 불편하다. 반짝 이벤트로 돈을 쥐어주고 금새 이웃화시킨 사람들을 잊는다. 더 잔인한 건 이 돈이 작은 도움 때문에 이들의 입을 막아 버린다는 현실이다.

환자가 나를 이웃으로 여길 때까지 기다린다. 나 자신을 그들에게 이웃으로 선택받아야 할 자리에 놓으면서 나와 환자의 관계는 동등해진다.

나는 병원에서 환자들을 방문하는 직종에 종사한다. 이 환자들이 나를 그들의 이웃으로 받아들이기 전까지 나는 어떤 환자도 내 이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의 이웃이 되기 위해 노력을 멈춘다는 말이 아니다. 환자가 나를 이웃으로 여길 때까지 기다린다. 나 자신을 그들에게 이웃으로 선택받아야 할 자리에 놓으면서 나와 환자의 관계는 동등해진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이웃을 “나란히 또는 가까이 있어서 경계가 서로 붙어 있음”이라고 정의한다. 나란히 가까이 있어서 서로 붙어 있는 상태에 이르려면 언제나 상대방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웃은 나와 타인과의 동등한 ‘이음’이다. 나 혼자만 내 이웃이라고 상정한 이에게 나란히 가까이 경계가 서로 붙어 있는 행위는 민폐고 폭력이 될 수 있다.

이웃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괜한 트집을 잡았나 싶다가도 이런 트집을 아무도 안잡으니 나라도 해야겠다. 이제 우리에게 불우 이웃은 없다. 인내도 사랑도 없는 우리의 처지가 불우할 뿐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이웃으로 택함 받을 인내와 사랑이 있나 묻는 우리 안의 비평적 성찰이 먼저다. 이웃 찾기란 이웃으로 선택받으려는 측은지심으로 체화된 우리 안의 몸부림이다.

photo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