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미 | 사)통일의 집 상임이사, 이한열기념관 학예연구실장
어머니는 하루 일과를 끝내고 돌아오면 두 눈을 반짝이며 두레방에서 만난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 하곤 했다. 정말 놀라웠던 것은 어머니는 기지촌 여성들에 대해 정말로 편견이 없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그들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존경했다.
나의 어머니의 처녀시절 이름은 Harriett Faye Pinchbeck이다. 결혼 후 그녀의 이름은 문혜림. 어머니는 1936년 미국 코네티컷 주 장미 농장 집 딸로 태어났다. 영국에서 이민 와 자수성가한 부모님은 조랑말을 사줄 정도로 딸에게 풍족한 생활을 누리도록 해줬다. 그러나 어머니는 풍요로움 속에 안주하지 않고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의 의미를 고민하셨다. 교회 선생님들을 통해 1950년대 미국에서 불었던 흑인인권운동을 접하였고, 방학에는 뉴욕 할렘가에서 봉사하며 이들의 삶을 접하였다.
어머니는 소외된 이들을 돕겠다는 삶의 방향을 결정한 후, 하드포드 신학대학원에 입학해 사회사업을 공부하였다. 그때 자신의 인생을 180도 바꿔 놓을 인연과 마주치게 된다. 바로 한국에서 유학 온 15살 연상 문동환 목사와의 만남이었다. 그와의 사랑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벽들이 있었다. 결코 쉽지 않았던 결단을 내리고는 미련 없이 미국을 떠났다. (실제로 배를 타고 태평양을 2주간 건너왔다.) 1961년 12월 16일 함박눈이 내리던 날, 경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전쟁을 막 끝낸 가난한 나라 한국에서의 생활은 고달팠으나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어 행복했다. 한국인으로 살고자 한국어를 배웠고 한복을 입고 아기를 업어서 키웠다. 1970년대에는 남편과 함께 ‘새벽의 집’ 공동체를 시작해 자본주의와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삶을 실험하였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문과 79년 YH 사건으로 남편은 두 번에 걸쳐 27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그 시간은 외롭고 고단했으나 어머니는 씩씩하게 구속자 가족들과 함께 보라색 한복을 입고 시위를 벌였다. 어머니는 양심적인 선교사들의 모임인 “월요모임”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투쟁 소식을 해외로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 당시 어머니는 미군부대에서 사회사업가로 일하고 있었다. 알콜과 약물 중독 미군들을 상담해주는 일을 하고 있었기에 미군의 우편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었다. 검열을 받지 않고 신속하게 한국의 인권 상황을 해외에 알리고, 빅토리 숄 등 다양한 물품들을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사회사업가로 미군의 상담을 해주던 어머니는 미군들의 옆에 있지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기지촌 여성들을 만나게 된다. 어머니는 언젠가 이 여성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는 작은 꿈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 그리고 십 여 년이 지난 후 마음속으로만 품었던 그 씨앗은 싹을 피워 올린다.
어머니는 미국장로교회의 지원 프로젝트로 예산을 마련하여 1986년 의정부에 선교센터 “두레방”을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이들은 외부인들에게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틈을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여성들에게 영어 수업으로 다가갔다. 두레방 사업은 영어 수업에서 시작해 상담과 공동식사,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방, 여성들의 자활을 위한 빵 만들기 사업으로까지 이어졌다.
어머니는 하루 일과를 끝내고 돌아오면 두 눈을 반짝이며 두레방에서 만난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 하곤 했다. 고아원에서 굶주림과 목마름을 견디며 가난하게 자라난 여성이 어쩔 수 없이 기지촌으로 흘러 들어오게 된 사연에 안타까워했고, 그러한 환경에서도 이웃을 더 아끼고 사랑을 나누는 이들을 보며 감동받았다.
어머니는 미군들의 옆에 있지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기지촌 여성들을 만나게 된다.
하루는 제이슨 엄마가 새 포대기로 아기를 업고 있기에 엄마는 “그 포대기 얼마 주고 샀어요?” 제이슨 엄마가 다소 비싼 가격을 말하자 엄마는 “비싸네. 좀 깎지 그랬어요?” 그랬더니 제이슨 엄마는 누비포대기를 만들려면 여공들이 얼마나 힘들게 재봉틀을 돌려야 하는지 아느냐면서 그 생각에 값을 깎지 못했다고 말했다. 자신도 힘들고 가난한데 더 어려운 이들을 염려하고 위해주는 인정이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기지촌 여성들 가운데 예수를 만났다고 고백하곤 했다.
정말 놀라웠던 것은 어머니는 기지촌 여성들에 대해 정말로 편견이 없었다. 편견이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존경했다.
어머니는 두레방 활동을 통해 “양공주”로 낙인 찍혔던 여성들이 우리의 이웃이고 가부장적인 군사문화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사회에 알렸다. 두레방 운동은 여러 성매매여성을 돕는 단체의 출범으로 이어졌으며, 2004년 성매매방지특별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어머니는 1992년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 뉴욕에서 한국인 여성들을 위한 “무지개의 집”을 설립하고 활동했다. 2019년 3월 9일 사랑하던 남편을 먼저 보낸 후 미국 뉴저지에서 막내 딸 영혜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