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다스리기

등현스님 | 고운사[1] 화엄승가대학원 원장

불교계 분들은 인연을 귀하게 여기는 듯하다. 깊이 새길 부분이다. 원불교 아지타 교무께서 연결해주신 ‘인연’으로 등현스님의 글을 받아 여기에 기재합니다(편집부).

무엇을 수행이라 하는가? 초기불교의 수행에 해당하는 단어는 계발(bhāvanā)이다. 그러면 무엇을 계발시키는가? 몸, 말, 마음(身口意)으로 행하는 열 가지 행위를 나와 남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행위하도록 계발시키는 것을 수행이라 한다. 몸과 입으로 행하는 일곱 가지 나쁜 행위, 즉,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은 것을 취하며, 배우자가 있는 이성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 등과, 거짓말, 꾸밈말, 이간질하는 말, 거친 말 등의 일곱 가지 나쁜 행위를 삼간다.

다른 생명을 위하고, 주지 않은 남의 것을 취하지 않으며, 배우자가 있는 이성과 사랑을 나누지 않는 행위와 진실한 말, 화합하는 말, 꾸밈없는 진솔한 말, 부드러운 말 등의 일곱 가지 착한 행위로 계발한다. 이렇게 몸과 마음으로 짓는 일곱 가지 이로운 행위가 충족되면 다시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수행이다.

“몸, 말, 마음(身口意)으로 행하는 열 가지 행위를 나와 남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행위하도록 계발시키는 것을 수행이라 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수행은 이 세 가지 중에서 주로 마음을 닦는 것이 수행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면 마음은 무엇인가? 마음은 보통 느끼고 생각하고 욕구하는 작용이다. 그러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욕구하는가? 인간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에 의해서 받은 표상을 마음에 받은 후, 느끼고 생각하고 욕구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독일의 현상학자 훗설은 마음은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무엇을 지향하는가? 대상 또는 표상을 지향한다. 그 표상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서 왔는가? 나의 몸 밖에 있는 물질들을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받은 이미지이다. 나의 몸 밖에 있는 물질들이 마음에 의해 비추어진 표상들이라서, 순수한 마음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마음에 속하였기에 심소(心所)라 한다.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마음이고, 마음은 순수하다.

심소는 느끼고(受) 생각(想)하고 욕구(行)하는 작용을 말한다. 흔히 ‘마음을 다스린다’라는 말은 욕망이라는 심소(心所)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 세상의 많은 불행은 바로 잘못된 욕망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이 욕망은 좋아하고(好) 싫어하는(惡) 욕망이고, 삶과 인간관계에 고통이라는 결과를 가져다주기에 다스려야 한다. 이러한 좋아하고 싫어하는 욕망에 감정이 동요되지 않는 것을 일반적으로 마음을 다스린다고 한다.

욕망을 다스리는 데는 좋아할 만한 것도 본래 없고, 싫어할 만한 것도 본래 없다는 것을 깨달아 다스리는 방법과,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단지 참음으로써 다스리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참는 것을 참된 수행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좋아하고 싫어함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보아서, 좋음과 싫음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욕망이 왜 발생하는지를 아는 것이 욕망을 다스리는 관건이다. 욕망의 구성요소를 알아야 욕망을 다스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욕망의 구성요소는 어떤 사물에 대해서 ‘옳다, 그르다(是非)’라고 판단하는 작용과 그 어떤 대상에 대해서 ‘유익하거나 해롭다(利害)’고 믿는 두 가지의 판단작용이다.

사람들은 ‘내가 옳다’라는 믿음 때문에, 또는 ‘나에게 이롭다’라는 판단작용 때문에 그 대상에 집착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생각(想)이라는 심소를 다스리는 것이다. 생각은 어떻게 다스리는가? 옳고 그름에 대한 집착은 옳고 그름이 본래 없음을 앎으로써, 이로움과 해로움에 대한 집착은 자타불이를 이해함으로써 다스릴 수 있다.

절대적 선(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수학적 공리에만 존재할 뿐이다. 경험 세계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실수한다. 인간은 오욕락을 가지고 있기에 끊임없이 선해지려고 노력할 뿐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지금 현재에 내게 이로운 것이 후에는 해롭고, 지금 현재에 해로운 것이 나중에 이로운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가난함이 근면 성실함을 키우고, 풍요로움이 오히려 나태함을 키울 수 있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바르게 생각함으로써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기에, 생각을 다스리는 것을 마음을 다스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만 다스린다고 욕망이 다스려지는 것은 아니다. 이성과는 별개로 작동하는 다른 욕망의 경우를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좋은 느낌은 욕구하고 싫은 느낌은 밀쳐내 버리는 느낌에 대한 호오(好惡)이다. 이런 경우에는 느낌을 다스려야 욕망이 다스려진다. 흔히 좋은 느낌은 끌어당기고 싫은 느낌은 밀쳐내는데, 그것 자체가 바로 괴로움이다. 왜냐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으면 괴로움이고, 원하는 상태 그 자체가 불만족이라는 괴로움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욕망(行)의 일어남을 자세히 관찰하면, 즐겁고 괴로운 느낌(苦樂受)과 이롭고 해롭다는 생각(想)의 두 가지 합이 긍정적일 때 바로 욕망이 발생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과 즐겁다고 느껴지는 것의 두 가지 구성 요소를 다스리지 않으면 욕망을 다스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욕망을 다스리려면 생각을 다스려야 하고, 생각을 다스리려면 또한 느낌도 다스려야 한다.”

이처럼 욕망을 구성하는 요소를 자세히 살펴보면 세 가지다. 첫째는 즐겁고 괴로운 느낌, 둘째는 옳고 그르다는 판단, 셋째는 유익하고 해롭다는 이해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서로 의존되어 작용한다. 그러므로 행복한 인생을 영위하려면 불행으로 인도하는 욕망을 행복으로 인도하는 욕망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이 욕망은 참는다고 다스려지는 것은 아니다. 참기만 하면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서 나중에는 쓰나미 같은 욕망이 한꺼번에 폭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을 일으키는 데는 원인이 있다. 욕망은 이롭고 해롭다는 생각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욕망을 다스리려면 생각을 다스려야 하고, 생각을 다스리려면 또한 느낌도 다스려야 한다. 왜냐하면 좋은 느낌은 유익하고 유익함이 옳은 것이라는 판단을 사람들은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게임에 탐착하는 한 소년이 그것이 최고의 즐거움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거나, 마약을 즐기는 사람이 그것을 최상의 즐거움이라고 굳게 믿고 있으면 그것들로부터 빠져나오기는 무척 어렵다. 그것들을 즐기는 그 순간만큼의 즐거움은 인정되더라도, 즐김의 순간이 지나고 난 후의 무상함, 허망함 그리고 그것들을 즐기기 위해 소모된 경제적인 해로움 등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 욕망의 합은 그다지 유익하지도 않으며 괴로운 결말을 가져다주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욕망을 충족시키고 난 후의 결과가 심성의 피폐, 경제적인 손해등의 부정적인 측면이 있음을 알게 되면 즐거운 욕망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즐거운 욕망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 대상에 대한 욕구를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이 어떠한 특정 대상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대상이 유익하거나, 옳다라는 판단 작용에 의지해서 발생한다. 그리고 지금 좋은 것이 결코 항상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그와 같은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다.

필자는 오렌지 주스를 무척 좋아하였다. 아마도 열대 지방에 오래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전에 태국의 대학에서 강의할 때 일이다. 첫 강의료를 받고 학생들과 함께 백화점에 가서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 학생이 이런 말을 하였다. 호주의 한 방송에서 오렌지 주스를 만드는 과정을 촬영하여 고발하였는데, 그들은 오렌지에 묻어 있는 하얀 농약 가루를 제대로 씻지 않고, 오렌지를 담은 큰 통에 장화를 신고 사람이 들어가서 밟았다는 내용이다. 그 동영상을 본 학생은 오렌지 주스가 인체에 해롭다고 판단을 하였고, 많은 학생이 그 말에 동의하였다.

이처럼 한 사람이 무언가를 좋아할 때, 몸에 이로우면 좋아하고 해로우면 싫어하게 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에서 생각하면, 이 세상에 약이 안 되는 음식도 없듯이 독이 없는 음식도 없다. 다만 내 몸이 그것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가와 독성이 얼마나 있는가의 함수 관계에 의해서 그 대상이 내게 얼마나 이로운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지 결정적으로 이롭고 해로운 것은 없는 것이다.

2월에 한국에 입국한 후 지인에게서 오렌지 주스 한 박스를 선물 받았다. 그러나 몇 달 동안 오렌지 주스를 마시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은 욕구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오렌지 주스를 좋아했던 이유는 열대 지방에 살면서 땀을 많이 흘렸기에 몸이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추운 한국에 오니 차가운 성분의 주스를 욕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조건이 해체되면 좋고 나쁠 것이 본래 없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느낌에 자성이 없다’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때 오렌지 주스를 좋아한다는 것이 온도와 기후 등의 여러 가지 조건에 의존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것을 떠나서 오렌지 주스 자체가 좋고 나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즉, 느낌 자체가 조건에 의지해서 발생하며, 조건이 해체되면 좋고 나쁠 것이 본래 없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느낌에 자성이 없다’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다스리려면 욕구를 다스려야 하고, 욕구를 다스리려면 생각과 느낌을 다스려야 한다. 즉, 욕구도 공하고, 생각도 공하며, 느낌도 공하다는 것인데, 반야심경의 오온자성개공이 그것이다. “관자재 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의 자성이 공함을 보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느니라.”


[1] 신라 신문왕 원년(681)에 화엄종의 개산조인 의상스님이 세운 절. 경북의성에 있다(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