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행복이 있는 곳, 마음

박은정 | 나란다불교학술원장, 달라이라마 한국어통역관

한 통의 전자 메일을 받았습니다. 한재경 목사께서 이야기꽃을 통해 이웃과 종교간 연대, 평화, 자연 등의 주제로 잡지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꾸미고 싶다는 말씀과 함께 동참해주기를 바라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공공선에 기여하고 싶다는 아름다운 마음에 압도되어 원고를 써보겠노라고 허락은 했지만 막상 시작하려하니 선뜻 글이 써지지 않았습니다. 그간 불교 잡지에 여러 번 기고했지만 지금처럼 어려웠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것도 30년 가까이 소위 전공으로 다뤄왔던 마음이란 주제를 놓고 말입니다.

어려운 마음을 들여다보며 생각난 분이 있었습니다. 달라이라마. 그분은 많은 이웃종교인들로부터 강연 요청을 받았고 이웃종교인들 앞에서 강연을 할 때마다 마음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고백하십니다. 혹여 은연중에 나오는 당신의 이야기가 상대 종교인의 신앙에 혼란의 씨앗을 심어 해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노파심이 있었던 것처럼 저도 유사한 고민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저는 30년 가까이 불교를 공부한 사람이기에 어쩔 도리 없이 불교적인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또한 그러한 생각에서 비롯된 이야기가 혹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가능하다면 종교를 초월한 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본질적으로 마음과 종교는 사실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모든 만물과 현상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 이 근원적인 물음에는 물질이 근본적인 실재이며 마음은 부차적인 산물에 불과하다는 유물론(materialism, 唯物論)과 반대로 마음이 근본적인 실재라는 유심론(spiritualism, 唯心論)의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신의 존재를 믿는 유신론(theism,有神論)의 종교에서는 모든 만물과 현상이 하느님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고, 무신론(atheism,無神論)인 불교에서는 모든 만물과 현상은 카르마(Karma,業)라는 에너지로 형성되는 것인데 그것은 다시 무수한 생명체의 마음에서 빚어진 유기적 결과로 봅니다. 따라서 유신론의 종교이든 무신론의 불교이든 모두 유심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때문에 마음과 종교의 이 깊은 관계성은 근원적인 물음에서조차 배제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만물과 현상을 논할 때 ‘카르마’라는 응보적(應報的) 에너지가 바로 우리가 원하는 행복과 우리가 원치 않는 불행이라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원인이며 그것은 다시 마음이라는 원인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므로 마음이야말로 우리를 행복으로, 또는 불행으로 이끄는 주된 핵심적 요인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행불행에 가장 직접적인 원인인 마음에 모든 초점이 맞춰지는 것입니다. 불교가 그토록 마음과 내면에 집중하라고 힘주어 말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바라 마지않는 행복 때문입니다.

작은 벌레 앞에 손가락을 가져가면 놀란 듯 재빠르게 달아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찮은 미물조차 고통을 원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치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어떠한 마음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어떠한 마음이 우리를 불행의 늪으로 이끄는 것인지를 알 때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행복을 이루고, 원치 않는 고통을 피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행불행에 가장 직접적인 원인인 마음에 모든 초점이 맞춰지는 것입니다. 불교가 그토록 마음과 내면에 집중하라고 힘주어 말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바라 마지않는 행복 때문입니다.

행복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물질에 의한 육체적 행복과 심리적 만족감에 의한 정신적 행복이 그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두 가지 행복이 모두 중요하지만 어떤 것이 더 우위에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 더 우위에 있느냐의 물음은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뜻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행복은 상황과 사람에 따라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동등한 선상에서 비교해보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족하더라도 정신적인 괴로움이 있으면 그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 괴로움을 극복하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정신적인 만족감과 행복을 느낀다면 물질적 결핍이나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것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물질적 행복을 모두 누리는 부자들이 여전히 정신적 문제로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종교적 신앙 속에서 정신적 만족과 행복을 느끼는 종교인들이 물질적 어려움을 의연히 극복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정신적 행복이 물질적 행복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것을 중시하는 경향 때문에 일부 종교인은 물질을 부정하기도 하지만 인간은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는 존재이며,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물질이 필요하므로 결코 물질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오직 물질적 행복만을 추구하고 정신적 행복을 등한시하는 데 있습니다. 물질적 행복은 짐승조차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등동물인 사람은 짐승보다 나은 행복을 추구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사람으로 태어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적 행복이 우위에 있다는 것, 진정한 행복이 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것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알 때 진정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물질적 행복을 부정하지 않지만 물질적 행복이란 잠깐의 행복일 뿐 정신적 행복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임을 알 때 비로소 정신적 행복의 가치에 눈뜰 수 있으며 진정한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관은 매일 일상의 삶에서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나침판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할 때에도 그것이 진정한 행복을 이루게 하는 요소인지를 지표로 삼는다면 선택이 수월해지고 그 선택에 후회가 없으며 그로써 만족과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일상이 쌓이면 결국 인생 전체가 의미 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것도 마음에 있는 것이며 결과로써 찾아오는 행복도 결국 마음이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시라도 이 마음이라는 것을 떠날 수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원하며 나의 매순간에서 일어나는 마음이 미래에 나의 행복과 불행을 초래한다면 순간순간의 마음을 어찌 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음에는 여러 가지 마음이 존재합니다. 착하고 긍정적인 마음과 악하고 부정적인 마음들이 있습니다. 자신을 진심으로 아낀다면,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해지길 바란다면 어떤 마음이 나에게 이로운지 해로운지부터 잘 살펴야 합니다. 나의 행복에 기여하는 이로운 마음은 키우고 나에게 불행을 가져다주는 해로운 마음은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이 귀한 마음에 참된 행복이 있음을 알고 또 그 마음이 현재와 미래의 자신을 해치지 않고 이롭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로써 나와 남의 행복에 기여하여 모두가 나날이 행복해지기를 꿈꿔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