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를 용서할 수 있을까?

고통스러운 화해의 과정

데니스 유위마나 Denise Uwimana 번역: 미카엘

출처: Plough(March 9, 2021)

1994년 투치족에 대한 악명높은 학살은 르완다에서 처음 발생한 “민족적” 폭력은 아니었다. 1959년 중앙 아프리카 동쪽지역에서 철수한 벨기에 식민지 지배자들이 오랫동안 격동시켜 온 분노와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권력투쟁은 계속해서 유혈사태를 낳았다. 학살 생존자 데니스 유위마나(Denise Uwimana)의 책, ‘붉은 땅으로부터From Red Earth’에는, 1958년 태어나 대학살이 벌어졌던 시기에 살았던 앙투안 루타이지에(Antoine Rutayisire)[1] 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신발 속의 작은 돌조각도 길가의 바위 만큼이나 당신을 방해할 것입니다. 총으로 아버지를 쏜 사람 말고도, 버스의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려고 끼어드는 사람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일상입니다.”

2003년 라디오에서 르완다의 화해와 통일위원회 소속 위원이었던 앙투안 루타이지에 박사의 말을 들은 것도 그런 식이었다. 몇 년 후 그와 친구가 되었는데 그의 겸손에 감동을 받았다.  그는 계급이나 배경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존중했다.

1990년대 후반 복음 전도자였던 앙투안은 르완다 전역의 감옥을 순회하였다. 당시 르완다에서는 12만명 이상의 남자들이 집단학살의 책임을 물어 복역 중이었다.

키갈리Kigali[1] 감옥에서 설교하는 동안 앙투안은 눈에 띄게 동요하는 수감자를 보았다. 설교가 끝나자마자 그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

“예수의 피가 모든 죄를 씻어낼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는 떨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앙투안이 대답했다.

처음에는 더듬거리는 듯하다가 이내 단호하게, “내가 한 짓을 말하고 싶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모든 악행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천 명이나 되는 죄수들이 침묵 속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죽인 사람들의 얼굴이 밤마다 나를 괴롭힙니다. 그 남자는 소리를 질렀다. “1994년 후로 잠을 깊이 잔 적이 없습니다. 내 자신을 증오해 왔고 차라리 죽고 싶었습니다.”

그러더니 어깨를 펴고 확신에 차서 말했다. “법대로 처벌을 받겠습니다. 속을 모두 털어놓으니, 오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이 남자가 자리에 앉자, 다른 사람들이 하나 둘씩 일어서서, 본인들의 범죄를 밝히고 그들을 괴롭혔던 죄책감을 털어놨다.

이 때의 경험으로 앙투안은 살인자에게 손을 내밀었다고 격분한 생존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교도소 방문을 계속할 수 있었다.

“당신이 하는 일은 배신이야” 미망인이 악을 썼다. “어떻게 살인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

앙투안은 미망인의 항변을 이해했다. “정의나 복수를 포기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회개와 용서, 치유를 많이 경험한 나로서는, 이 땅에 구원이 오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의 말이다.

Antoine Rutayisire (source, Plough.com)
앙투안은 무하지 호수가 작은 마을인 응테테 투치족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가게와 고깃배 두 척, 가족농을 하고 소에게 풀을 먹일 수 있는 경작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말이다.
내 첫 기억은 행복했어요. 집안에는 웃음이 넘쳐났고, 부모님 사이에서 날카로운 말다툼은 생각나는 게 없어요.  그분들은 우리가 지나치게 행동할 때만 꾸지람을 하셨어요.
아버지는 가게에서 팔 물건을 사기 위해 65마일 떨어진 우간다까지 정기적으로 다녀 오셨어요. 아버지가 없는 동안, 어머니는 저녁이면 노래를 불러 주시고 이야기도 들려 주셨어요. 돌아오실 때 늘 과자를 사 오셨던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렸죠.
하지만 다섯 살이 되기도 전인 1960년대 초반, 우리의 일상은 완전히 깨져버렸어요. 행복했던 저녁은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전등과 난로를 꺼야만 했어요. 관심을 끌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아버지가 설명해 주셨죠. 일찍 저녁을 먹고 말없이 잠자리에 들었어요.
어느 날 밤, 형은 건물을 태우는 불길이 지평선을 붉게 물들였다고 말했어요. 다음 날 헬리콥터 들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굉음을 냈습니다. 그들의 거대한 칼날이 사람의 머리를 잘라낸다는 소문이 아이들 사이에 퍼졌습니다. 그들이 다가온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두손으로 목을 감싸고 도망쳐 숨었습니다.
어느 날, 이웃집은 완전히 불타 버렸고, 매맞는 이웃을 형과 저는 멀리서 지켜봤습니다. 파괴자들이 떠나면서, 그 중에 한 놈이 몽둥이를 우리 쪽으로 휘두르며 소리쳤습니다. “내일은 너희 차례야!”
다음 날 정오에 우리 형제가 송아지를 집으로 몰고 왔을 때, 몹시 긴장해서 말이 없으신 부모님을 발견했습니다. 어머니는 점심을 거의 잡숫지 못했는데, 대문짝에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리더니, 마을 사람들이 떼를 지어 고함을 지르고 쿵쿵거리며 우리 마당으로 몰려왔어요.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셨어요. 나가시는 순간 아버지는 땅바닥에 엎어지셨고, 이웃들이 망치와 몽둥이로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내 몇몇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우리 음식을 낚아채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다른 사내는 우유 컵을 식탁 밑으로 던져 버렸고요. 어머니에게 매달리며 밖으로 쫓겨간 우리는 마당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피를 흘리며 쓰러지셨는데 미동도 없으셨어요. 사람들은 분주히 드나들며 챙길 것은 챙기고 아닌 것은 부숴버렸습니다. 우리 집은 몇 분만에 난파선이 됐어요.
가해자 한 명이 모퉁이를 돌아 급하게 달려왔다. 악의로 번득이는 눈빛으로 못이 박힌 몽둥이를 우리 머리 위로 휘두르며 위협했어요. 다행히 다른 사람이 그의 팔을 잡고 소리쳤습니다.  “하지마, 얘들 피는 재수가 없어.”
 그렇게 약탈품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서둘러 아버지에게 달려 갔습니다. 망치로 맞은 얼굴은 부어 있었고, 몸은 부은 자국과 상처로 엉망이었습니다. 다행히 아버지는 숨을 쉬었습니다. 어머니는 상처를 닦아 내기 시작했어요. 아버지가 겨우 눈을 떴을 때, 집안으로 모셨고, 그 후 몇 주 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넉넉한 편이었던 우리 가정은 단 한시간만에 가난으로 떨어졌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다시 놀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사업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어요. 남동생이 태어났고, 어머니는 노래와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증오의 씨앗이 내 가슴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내 마음의 눈에는 여전히 이웃들이 음식과 우유를 내던지는 장면이 보였어요. 몽둥이로 우리를 위협했던 사내를 지나칠 때마다 나는 그 사람을 심판할 운명의 날을 생각했습니다.
스스로에게 다짐했죠. “내가 어른이 되면, 반드시 그 놈을 죽일 것이다. 아니면, 그 놈의 아이라도 죽일 것이다.”
무서운 소문이 다시 돌기 시작했어요. 이번에는 이넨지(투치족 경멸어로 바퀴벌레)가 북쪽에서 침입했다고 했어요. 침입자를 조심하라는 경고도 받았습니다. 형은 학기를 막 시작했는데, 단지 투치족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있다고 말해 줬어요. 많은 이들이 르완다로 도망쳤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아버지가 안 계셨어요. 물건을 사러 가셨다고 생각했어요. 다음 날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길가에 서서 집으로 돌아오시는 아버지를 제일 먼저 보고 싶어 기다렸어요.
막내를 재우며 부르는 어머니의 자장가는 슬퍼 보였어요. 어머니의 마음은 요동쳤어요. 어떤 날은 깊은 생각에 잠기셨고, 다음 날은 짜증을 내셨어요. 나는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했어요. 
어머니는 새벽부터 깨우기 시작하면서 꾸짖었어요. “왜 어른처럼 행동하지 않는 거야?” 어머니는 겨우 여덟 살인 형에게 소를 돌보라고 하셨어요. 나는 여섯 살이었는데 물과 장작을 옮기고, 마당 청소를 하고, 우유 짜는 일을 도왔습니다.
9월이 되자 어머니와 처음 학교에 갔어요. 다른 부모들이 자녀들을 입학시키고 있었고, 나도 카키색 교복을 입고 줄을 섰는데 무척 자랑스러웠어요. 등록처에서 선생님 한 분이 일반적인 질문을 하고 계셨어요.
 “아이 이름은?” 내 차례가 오자 단조롭게 물었어요. 
“앙투안 루타자이에,” 어머니가 대답하셨죠. 
“태어난 연도는?”
“1958년.”
“아버지 이름은?”
“카라시라 페테로 클라버.”
“신분은? 생존해 있나?”
어머니는 망설이면서 나를 보시더니, 대답하셨어요. “아니오,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셨다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아니야. 아버지는 죽지 않았어! 물건을 하러 우간다로 가셨고, 곧 돌아 오실거라고…
아버지가 떠나 있는 몇 주 동안, 돌아가셨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죠. 나는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어요. 흐느끼기 시작했죠. 어머니와 나는 큰 길을 피해 서둘러 돌아왔어요.
카라시라 페테로 클라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을 거에요. 돌아가셨죠.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었어요…
여전히 일찍 일어나 집안 일을 했지만, 많이 울었어요. 학교에서 집까지 달려가며 눈물을 닦았어요. 반친구들이 땀으로 생각하길 바랬죠. 무엇으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울지 않는 나이가 되어서도 제 눈물은 멈추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어머니는 한 말씀도 안 하셨지만, 다른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1963년 12월, 투치족 망명자들은 르완다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결성했습니다. 보복차원에서 후투족 정부는 전국에서 영향력 있는 투치족 사람들을 체포했고, 감옥으로 끌고 가 처형했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해결해 줄거라 말하지만, 아닙니다. 나는 무언가 큰 일을 할 만큼 강해질 날을 꿈꾸었습니다. 그 큰 일이란 후투족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었어요. 그날 내가 흘린 눈물만큼 그들도 울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앙투안은 8살 때 키지구로Kiziguro 가톨릭 교회까지 10마일을 걸어간 게 첫 여행이었다. 교회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신은 매우 부유하고 위대하겠구나. 저렇게 큰 집을 갖고 있다면, 저 하늘 위에 뭔가 다른 게 있겠지.” 골똘히 생각했다.

벨소리에 생각이 멈췄고, 신도들은 일어섰다. 흰옷 입은 아이들이 앞서고, 장엄하게 예복을 입은 신부가 향로를 흔들며 통로를 따라 뒤따랐다. 발코니에서 들리는 합창단의 찬양은 마치 천상의 소리 같았다.

앙투안은 그날 신부가 되기로 결심했다. 소 풀을 뜯기기 위해 개미언덕에 올랐을 때 상상속의 회중을 축복하기 위해 팔을 뻗었다. 1970년 12살의 앙투안은 버스를 타고 먼 길을 혼자 여행하여 주니어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것이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한 첫번째 걸음이었다.

그러나 1973년 인근 학교의 후투 학생들은 투치 학생들을 쫓아내기 위해 후투 신학교에 입학했다. 무장한 군인들이 폭력을 막기위해 각 학급에 배치되었고, 주교가 방문해서 미래의 신부들을 책망했다. 그가 떠난 후 다소 잠잠해졌지만, 후투 학생들은 투치족을 몰아내지 못해 속이 말이 아니었다. 투치족 동기 친구들도 똑같이 화가 나 있었다.

앙투안은 모든 후투족은 나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주니어 신학교를 졸업할 무렵, 종교에 환멸을 느끼던 앙투안은 신부가 되려는 생각을 포기했다.

대신에 르완대 국립대학에서 인문학을 공부한 앙투안은 1983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인생은 마치 약속으로 가득 찬 듯 보였다. 저명한 교수가 되기 위해, 박사 논문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주여, 몽둥이로 나를 위협했던 이웃에게 복을 내려 주소서. 그들의 아내에게 복을 주시고, 딸들에게도 복을 내려 주소서…”

그러나 지방의 고등학교로 배정되었다는 소식에 그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고등교육 책임자와 약속을 잡은 그는 수석졸업 표창장을 내보이며 호소했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난 네가 똑똑하다고 생각했어,” 책임자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대학교수진에 결코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겠어?”

그랬다. 앙투안은 이해했다. 투치족이었으니까.

익숙한 분노가 끓어올랐고 증오의 눈물이 눈가에 가득 고였다. 1963년 아버지, 1973년 친구들, 1983년 앙투안의 경력까지… 수십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2등국민이라는 현실에 신물이 났다.

어쩔 수 없이 앙투안은 룰린도Rulindo 여자고등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너무 멀어서 먼지 자욱한 시골길을 버스가 일주일에 한번만 다녔다.

인생에 혐오를 느낀 앙투안은 동료들과 거리를 두었다. 너무 지루한 나날 속에서 성서를 읽기 시작하자 강한 흥미를 느꼈다. 특히 구약과 신약에서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가 앙투안에게 무언가 살아가야 목표를 찾도록 도전하고 있었다.

앙투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살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시대에 분개해서 떠돌아다녔을 뿐이었다. 성서를 읽을수록 스스로 살아갈 규범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성서가 옳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르다고 하는 것을 그르다 하겠다고 결심했다.

어느 날 저녁, 복음서를 읽다가 예수가 죽음을 향해 여행하는 이야기에 사로잡혔다. 앙투안 자신이 그 드라마에 빠져들었다.

나는 호산나를 부르며 기쁘게 환영하는 군중에 합류한다. 군중이 흩어지면서 행복감도 사라진다. 스승과 열 두 제자만 남는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다락방에서 분위기는 침울해진다.
제자 중 한 명이 떠나고, 나머지는 정원 밖 어두운 곳으로 나간다. 예수는 혼자 남아 나무 아래서 기도한다.
불현듯 유다가 횃불을 든 폭도들을 데리고 돌아온다. 이번에는 “호산나”가 아니라, “체포하라! 체포하라! 도망치지 못하게 하라!”
예수는 망치와 몽둥이로 폭행당한다. 예수는 끌려가고 나는 그 뒤를 따른다.
이제 깡패들에게 둘러 쌓인 아버지가 보이고 나는 여섯 살이다. 모든 걸음마다 열정이 넘쳐난다. 골고다에 도착할 때 쯤, 내 옆에 내가 서 있다. 후투 놈들! 얼마나 오랫동안 무고한 사람들에게 이런 짓을 계속할 것인가?

앙투안이 성서를 읽어가는 도중 무언가 꿈틀거렸다. 성서 이야기와 떨어져 있을 수 없었다. 예수께서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기도할 때, 앙투안은 울부짖었다. “안돼! 안돼 절대 안됩니다! 주님, 어떻게 저들을 위해 중보하실 수 있으십니까? 먹이시고 치유하셨던 저들이, 이 자리에서는 선을 악으로 갚으며 소리지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 당신은 저들을 저주해야만 합니다.

앙투안은 참을 수가 없었다. 절대 예수에게 동의할 수 없었다. “그 따위 잊어버려.” 성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밖으로 나가 산책을 했다. “주님, 제가 아버지를 죽인 후투족을 용서하리라고 기대하는 건 아니겠죠.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을 따르겠지만, 이건 아닙니다. 저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앙투안은 2주 동안 고심을 거듭했다. 결국 이 문제 때문에 하루 휴가를 냈다. 신약성서를 펼쳐 들고, 적을 어떻게 대하는지 모든 구절을 읽어 나갔다. 크리스찬에게 용서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계명인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용서는 원수에 대한 호의가 아니라, 내 영혼의 치료제이다.”

앙투안은 증오했던 각각의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그의 아버지를 때렸던 이웃사람들, 아버지를 죽이라고 명령했던 시장, 1973년 후투족 급우들, 교육부 책임자, 그리고 더 많은 이름들. 예수가 말씀하신 대로, “너희를 박해하는 자에게 복을 빌어라.” 앙투안은 그들을 용서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여전히 저항으로 몸부림쳤다.  “안돼, 그들에게 저주를 퍼부어!”

앙투안은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고, 마침내 포기에 이르렀다.  패배자는 무릎 꿇었던 침대 옆 바닥으로 쓰러졌다.

너무나 낙담하여 졸음이 밀려오는 와중에, 생생한 그림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예수는 채찍질 당한 채 거친 나무에 매달려 있었고, 투박한 쇠못이 손과 발을 관통하고, 긴 가시는 이마를 꿰뚫고 있었다. 그의 마음과 영혼은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몸은 발가벗긴 채 조롱하는 무리들 앞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앙투안의 저항은 녹아내렸다. 겨우 깨어나자 울며 기도했다. “주님, 몽둥이로 나를 위협했던 이웃에게 복을 내려 주소서. 그들의 아내에게 복을 주시고, 딸들에게도 복을 내려 주소서…”

기도를 끝마칠 무렵, 앙투안은 몹시 지쳐 있었다. 하지만 곧 평화가 찾아왔다. 앙투안을 짓눌렀던 무거운 중압감도 가벼워졌다. 다음 날, 범죄자들의 행복을 바랄 수록, 그들이 저지른 짓이 주는 고통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용서는 원수들에게 주는 호의가 아니라, 내 영혼의 치유법”이라고 생각했다.

앙투안은 1990년 페니나와 결혼했다. 그녀는 룰린도 여자고등학교의 학생이었는데, 둘은 키갈리에 장착했다. 나는 1994년 르완다 대학살의 경험과 후유증을 물었다. 그의 대답이다:
4월 7일 아침, 라디오를 틀었어요. 들려오는 건 쓰레기같은 소식 뿐이었죠. 낯선 간주곡을 들으며 한참을 기다렸어요. 마침내 우리 삶을 영원히 바꿔 놓을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국방부는 각하의 비행기가 격추되었다는 소식을 발표하게 되어 유감입니다. 각하와 모든 동료 여행자는 사망하였습니다.”[2]
밖으로 나가보니, 이웃집 남자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요. 안부 인사를 건넸죠.
“뉴스 들었어요?” 그는 혼란스러운 듯 물었어요.
“네, 방금요.”
그는 헛기침을 하고 침을 뱉었다. “적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데 어떻게 하지?” 이 말에는 우리집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담배를 발로 비며 끄고는 집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더군요. 잠시 후 큰 칼을 들고 나타나 거리를 따라 내려갔어요.
도시 전역에서 살인이 시작됐어요. 페니나와 우리의 어린 딸 데보라와 함께 유엔 평화유지군이 보호하는 아마호로Amahoro 경기장에 숨어들기 전까지 집에 웅크리고 있었어요. 만 오천 명 정도가 그곳에서 망명신청을 했어요.
4월 19일 이른 아침부터 정부군은 경기장을 폭격했어요. 아이들을 위해 죽을 끓이던 여인들 한가운데 박격포가 떨어지고, 또 다른 포탄은 가족들이 진을 치고 있던 계단에 떨어졌어요. 사람들은 달아나고, 넘어지면서, 울부짖었죠. 폭격이 멈추고 공황상태가 잦아들고, 서른 다섯명이 사망했어요.
적십자가 도착했고, 저는 부상자와 사망자를 옮기는 일을 도왔습니다. 일을 마치고, 기도할 곳을 발견했어요. 내 손은 피로, 마음은 분노로 붉게 물들었어요.
그날 유엔에 대한 모든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유엔군은 엄폐하기에 급급했고, 무능한 포병들은 크고 사용하지 않은 장난감처럼 하늘만을 가리키고 있었죠. 그들은 이곳이 보호구역이라는 사실 때문에단 한 발의 총알도 발사하지 않았습니다. 유엔과 그 실체가 없는 “세상”을 용서하는데 몇 년이 걸렸습니다.
르완다 애국전선[3] 병사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잠입했습니다. 좀 더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도울 방법을 배웠습니다. 밤에 움직일 거라고 말해줬지만, 언제 인지는 몰랐습니다.
4월 24일 일요일 밤 9시쯤, 움직임과 속삼임이 들려왔어요. “떠나고 싶은 사람은 지금 움직여야 합니다.”
아내와 딸, 저는 애국전선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키갈리를 조용히 빠져 나오는 투치족 오천 명과 합류했어요.
마침내 우리 가족이 40명과 함께 머물렀던 교실이 있던 비움바Byumba[4]의 실향민 캠프에 도착했어요. 비움바에는 투치족 생존자 만 명이 피신해 있었습니다. 두 달 후에, 피신자는 두 배로 늘어났어요.

대학살이 끝나고 앙투안은 키갈리로 돌아왔다.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회개와 용서를 말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는 화해야말로 르완다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크고 작은 모임이나 라디오 방송에서 소리를 높였다.

어느 날 아침, 젊은 여성이 사무실 밖 복도에서 그를 불러 세웠다. 그는 “미안합니다. 이제 막 나가봐야 해서요. 등록금같은 문제가 있다면, 프로젝트 책임자가 도와줄 거에요.”라고 말했다.

울음을 터트리는 그녀 앞에서 깜짝 놀랐다. 그녀가 소리쳤다. “얘기좀 해요. 제 아버지 가슈기가 한 짓에 대해 당신께 용서를 구하고 싶어요.”

그 말이 앙투안의 주의를 끌었다. 가슈기는 ‘민족의 살인자’라고 명명했던 네테네의 시장이었다. 그는 투치족 살육을 주도했던 사람이었다.

앙투안은 젊은 여성을 사무실로 데려갔다. 그녀는 흐느꼈다. “제 이름은 임마쿨리에요. 지난 주에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당신이 자란 동네를 말했을 때, 당신 아버지의 처형에 우리 아버지가 책임자였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녀의 말은 계속되었다. “아버지가 해친 사람들을 찾아야 했어요. 제 마음이 얼마나 끔찍한지 말해주고 싶었어요. 우리 가족을 용서해 줄 수 있겠어요?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실 수 있나요? 학교에서 아이들은 저를 ‘살인자의 딸’이라고 불렀어요. 친구를 사귈 때마다 곧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더이상 친구가 되지 못했죠. 이 저주에서 자유롭고 싶어요!”

앙투안은 동료들을 증인으로 불렀다. 눈물 가득한 눈으로 앙투안은 이마쿨레의 손을 잡고 그녀의 가족과 삶을 위해 용서와 축복을 빌어 주기 시작했다. 여동생을 되찾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 만남으로 화해의 메시지는 앙투안 자신의 것이 되었다. 지금도 그는 화해를 위해 분투하고 있다.

[1] 르완다의 수도

[2] 1994년 4월 르완다 대통령의 암살로 내전이 촉발되었다. 대략 80만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역자주).

[3] Rwandan Patriotic Front, 대학살 3년전인 1987년 우간다로 도망했던 투치족 난민이 설립한 르완다 반정부 세력. 2003년 선거에서 르완다애국전선은 53개 의석 중에 33석을 얻었다(출처: 위키피디아)

[4] 르완다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북부 주의 주도이다. 키갈리에서 북쪽으로 60km 떨어져 있다(역자주).


[1] 르완다 성공회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