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푼 꿈을 안고

미국에서 체류하는 서류미비 한부모가정이 ‘살아낸’  이야기입니다(편집부).

유**| 싱글맘, 뉴저지

한국에서 미국 땅에 올 때는 누구나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옵니다. 저 역시 더 잘 살고자 하는 마음에 미국을 선택했습니다. 처음 샌프란시스코에 방문했을 때 집집마다 예쁘게 꾸며진 정원에, 여유롭게 바베큐를 즐기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풍요로운 미국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선택받은 민족과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풍요로움에 합류하고 싶은 마음에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2년만에 미국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번에는 친구가 사는 뉴욕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얼마되지 않아 내 뜻과는 다르게 순탄치 않은 삶이 펼쳐졌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 말라.’ 한국에 있을 때 책상 한켠에 세워진 액자의 글귀가 맴도는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냉정한 인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덩그러니 아이와 나만 남게 되었습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 미국에 와서, 일명 ‘싱글맘’이 되었습니다. 혈연이라곤 서부에 사시는 고모 가족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아이와 생을 마감한다 해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았습니다.

유모차를 끌고 정처없이 걷던 어느날, 제 눈에 비친 먹구름 낀 을씨년스런 날씨에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활을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차마 알릴 수가 없었습니다. 송구스런 마음도 있었지만 한국에 가도 환영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나를 더욱 괴롭혔습니다. 그나마 다양성을 존중하는 미국에서 살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힘든 생활에 숨이 막혔습니다. 은행 잔고는 나날이 줄어들었고, 결국 자동차를 리턴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10불 쓰려고 10번 생각하고, 수중에 100불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신발 밑창이 닳은 모습이 민망스러워 뒷 사람이 볼까 봐 빨리 걷기도 했습니다.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힘든 생활에 숨이 막혔습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 손에 어린 아기 손을 꼭 붙잡고, 다른 한 손에 장 본 물건을 들고 버스에 타면, 기사님께서 안면이 있다면서 때로는 차비를 안 받으셨습니다. 한편으로 이런 모습이 슬프고 부끄러웠지만,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다졌습니다. 하지만 어떨 때는 이런 내 모습이 왠지 처량하게 느껴져서, 하나님께 ‘왜 제게 이런 시련과 고통을 주시느냐’고 원망도 해 보았습니다.

사람 ‘인’ 자를 한자로 생각하며 ‘막대기’ 하나로는 인간이 절대 살지 못한다는 것을 뼈져리게 깨달았습니다. 아이를 혼자 키우는 건 더욱 그러했습니다. 특히 어린 아이를 데리고 일을 할 수 없어서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어렵사리 렌트한 아파트에 룸메이트들을 두면서 가까스로 렌트비를 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순탄하지는 못했습니다. 룸메이트를 구하지 못 해 렌트비가 밀리기라도 할 땐 피가 마르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여름엔 전기세를 아끼느라 에어컨 없이 살았습니다. 너무 더운날은 아이가 자다가 서너 번씩 울면서 깨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도 마음으로 울면서 목욕을 시키고 다시 재우곤 했습니다. 낮에는 더위를 피해 마켓으로 피신을 가면, 음식을 샤핑카트에 선뜻 담는 사람을 보게됩니다. ‘난 언제 저렇게 가득 음식을 사다 냉장고에 넣어둘 수 있을까’하며 그 분들을 부러워 했습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얼굴이 많이 부었네요”라고 인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인지 면역력이 떨어져서 제 몸에 8개월동안 밤마다 두드러기가 났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몸이 피곤했고, 보기에도 좋지 않아보였습니다.

 

이상과 현실은 달라

제가 지금 하는 일은 베이비 시터입니다. 일하는 엄마들이라면 비슷한 생각들을 하실 것 같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우리 아이와는 많이 놀아주지 못하고 책도 많이 읽어 주지 못한 게 너무 미안합니다. 살아가야 하기에 일이 급했고, 마음은 지치고, 슬프고, 늘 외로웠습니다.

아이에게 이런 저의 모습을 보인 것이 못내 가슴에 걸려서 마음이 아픕니다.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빨리 집에 가서 아이를 안아주고 칭찬도 많이 해주고 맛있는 음식으로 아이를 기쁘게 해주고 싶지만, 막상 집에서는 파김치가 되어 자리펴고 눕기가 일쑤입니다.

사랑을 회복하다

저는 사실 독실한 기독교인 부모님 밑에서 장녀로 자랐습니다. 어릴때는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다녔지만, 미국으로 오면서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아닌, 이민자들끼리 커뮤니티를 형성하려고 하는 신앙생활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한편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뉴욕에서 일하던 중, 어릴 적 다니던 교회 동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의 어려운 상황을 알게 된 그 후배가 “언니, 이럴 때 신앙생활해야 한다”고 권유했습니다. 교회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저에게 그 후배는 “언니 그럼 내가 같이 가줄께. 용기를 내” 라며 저를 교회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이 힘겨운 상황이었지만, 저는 결국 교회에 가게되었습니다. 목사님 설교 말씀, 기도 시간에는 눈물이 펑펑 쏫아졌습니다. 그 때는 너무 힘들고 지친 삶이었기에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돌아온 탕자’와 같은 회한의 눈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교회를 다시 가니 마음에 안정도 되었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도 바뀌었고, 오히려 하나님께 제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자녀들을 통해 힘든 상황에 처한 저를 돌봐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이웃들을 통해 경험한 것이 저의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이들 고마우신 분들의 손길을 나누고 싶습니다.

렌트비를 두 달치 밀리는 위급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기도도 안 나올 정도로 마음이 타들어갔습니다. 그래도 아이를 들쳐 업고 금요기도회에 갔습니다. 기도회 중간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하시며 저의 사정을 알게 된 장로님은, 그럼 우선 한 달치라도 렌트비를 내라며 체크를 건네주셨습니다. 너무너무 고마우신 A교회 정 장로 내외분입니다.

이외에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도움이 여러 교회공동체에서 다가왔습니다. 고마운 마음을 다 쓸 수 없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와같은 도움의 손길이 저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나는 협동조합의 도움을 기억합니다. 코로나로 직장을 잃고, 렌트비도 몇 달치 못내는 상황이었습니다. 쉬면서도 쉬는것 같지 않고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그럴 즈음에 1년치 렌트비 보조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랑 아이랑 너무 좋아서, ‘야하’라는 힘찬 고함을 터뜨렸습니다. 정말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 뒤로 신기하게 여건이 맞아서 일터까지 한 달음에 갈 수 있는 뉴욕으로 이사 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춘기 아이를 홀로 두고 뉴저지에서 뉴욕까지 멀리 일하러 갈땐 안타까운 마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앞으로는 훨씬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여건상 뉴욕에 아파트 구하는게 하늘의 별따기처럼 힘들었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나’ 하며 궁금하기도 하여 기도하며 기다렸는데, 기적처럼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고통의 터널을 지나 감사로

이 자리를 빌어 사랑을 나눠주신 많은 분들의 은혜로 살아왔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사랑의 빚을 하나님께서 친히 갚아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저와 아들이 꿋꿋이 일어나서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 빚을 갚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주님의 천사가 되어 저를 도와 주신 분들을 알리는 것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신 분들에게 소망의 증거가 되길 원해서입니다. 주님을 붙잡고 가면 항상 힘 주시는 주님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근심, 걱정 내려놓고 주님을 바라보시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저 역시 거저 받은 사랑을 힘든 이웃에게 돌려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의 터널에서 저를 단련시키시고, 주님을 더욱 단단히 잡고 가길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나고 보면 고통도 감사이고, 축복이다.’라는 말을 되새겨 봅니다. 이 고통의 터널을 지나가는 것이 감사함으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주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주위의 선한 사마리안인들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인 것을 고백합니다.